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침공 (문단 편집) === 폴란드의 저항 === 폴란드 정부 및 8만 5천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군 장병들은 프랑스에서 [[폴란드 망명정부]] 및 [[자유 폴란드군]]을 조직하여 항전을 선언했다. 자유 폴란드군은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당시 연합국 측에서 [[노르웨이]]를 도와 [[나르비크]](Narvik) 등지에서 싸웠으며, 이후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치열하게 싸웠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군 6천여 명이 전사했으며, 이외에도 1만 6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고, 1만 3천여 명은 독일에 항복을 거부한 채 [[스위스]]로 넘어가 억류되었다. 프랑스 함락 이후에는 폴란드 망명정부와 약 3만 5천여 명의 폴란드군이 다시 영국으로 탈출하여 항전을 지속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에는 폴란드 망명 조종사들이 [[영국 공군]]에 가세하여 파일럿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군에 도움을 주었고,[*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숫자에 비해 가장 큰 활약을 한 게 폴란드 파일럿들이었다.] 전쟁 전체를 통틀어 지상 요원까지 합한 인원 2만 명 가까이가 영국 공군에 입대해서 싸웠다. 육상 전투에 있어서도 [[북아프리카 전역]]의 토브룩 공방전과 [[이탈리아 전선]]의 [[몬테카시노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팔레즈 포위망에서 독일군의 퇴로를 막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전체적으로 서방 측에서 싸운 폴란드군은 25만 명에 달해서 적잖은 기여를 했고, 이들 중에는 [[마켓 가든 작전]]에 참전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폴란드 [[공수부대]]도 존재했다. 또한 폴란드군은 그동안 수집해 왔던 독일군 암호 체계 [[에니그마]]에 대한 모든 자료와 [[암호]] 해독 인력을 영국 정부에 넘겼으며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독일군 암호 해독에 성공, 대서양 전투에서 [[유보트]]를 막을 수 있었다. 이외에 [[프랑스 침공]]으로 독일에 함락당한 프랑스 내에서도 폴란드인들이 프랑스 국내군과의 연계 하에 저항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망명 정부가 이렇게 많은 협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윈스턴 처칠]]은 [[얄타 회담]]에서 폴란드 동부 영토를 소련에 넘겼다.] 단순히 국외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애국적인 폴란드인들이 반독 운동에 참여했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괴뢰정부도 세우지 않고 총독부(Generalgouvernment)를 설치하여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노예]]화하고 [[학살]]했다. 그 절정은 유대인들에게 행해진 [[홀로코스트]]로, [[아우슈비츠]]에서만 15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 기타 민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노예화 교육과 공공연히 행해진 공개 처형[* 예를 들어 1943년 바르샤바에서는 국내군의 공격으로 독일 경찰 5명과 친위대원 1명이 죽은 적이 있는데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인 100명을 학살했다.]과 일제 검거[* 폴란드어로 łapanka. 거리에서 갑자기 폴란드인들을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는 이들을 강제 이주시켜 학살하거나 강제 노동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는 폴란드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독일은 [[프레데리크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주하거나 허가 없이 가축을 길렀다는 이유만으로 폴란드인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은 친독 우크라이나인을 원조하여 폴란드 동남부에서 폴란드인들에 대한 인종학살을 벌였고, 종전 때까지 12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이들에게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인들이 다시 2만여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충성하는 '''[[폴란드 지하국]]'''(Polskie Państwo Podziemne)가 폴란드 국내에 결성되어 조직화 및 정보 수집,[* 예를 들어 [[V2]] 로켓의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게 이들이었다.] 대외 선전(지하 신문 발행 및 대외 연락, 라디오 방송 등), 군사 활동(대독 봉기 및 독일 주요 요인 암살, 폴란드인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저항. 이는 폴란드 지하 국가의 군사적 축인 국내군을 통해 이루어졌다)에 주력했다. 전쟁 기간 동안 폴란드의 국내군(Armia Krajowa)의 수효는 40만 명에 이르렀으며(일반적으로 국내군의 인원 숫자를 40만 명이라 하며, 실제 동조자의 숫자까지 합치면 최고점은 '''100만 명'''이 넘어간다) 이외에도 [[공산주의]] 성향의 인민군(Armia Ludowa),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방위군(Narodowe Siły Zbrojne), 중도 및 농업주의 성향의 농민 대대(Bataliony Chłopskie)까지 모든 노선의 폴란드인들이 가세하여 반독 투쟁을 벌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k_grupa_kampinos_pomnik01.jpg|width=450]] ▲ 캄피노스 집단(Grupa Kampinos) 소속 국내군을 기리기 위한 십자가. 십자가 중앙에 코트비차가 새겨져 있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반독 운동은 더더욱 활발해졌다. 예를 들어 1942년까지만 해도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의해 1달 평균 250~320여 명의 독일군 손실이 있었으나 1944년 초에 이르러 850~1천 7백여 명으로 증가했고, 조직도 더욱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의 구출에도 협력하여 [[바르샤바 게토 봉기]] 및 [[바르샤바 봉기]]에서 유대인들의 저항활동을 돕고 구출하는 동시에 [[아우슈비츠]]에도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를 파견하여 내부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전달했다. 전쟁 기간 동안 폴란드 저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추축군의 숫자는 15만여 명에 이른다.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선전에 과장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와 행방불명자, 포로까지 합치면 1개 군 이상이 폴란드 내에서 녹아 내렸다는 말이 된다. 소련군에 의해 최전선의 독일군의 뼈와 살이 발리던 1943년 4월에도 독일군은 45만여 명의 독일군을 치안 유지를 위해 폴란드 지역에 주둔시켜야 했다. 이 수치는 독일 지역으로 병합된 폴란드 회랑 및 그 일대와 폴란드 동부 지역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나치의 점령지에 대한 과도한 탄압과 학살, 그로 인한 점령지 시민들의 저항과 독일군의 피해,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독일군 병력을 전선보다 점령지에 할애해야만 했기에 나치 독일 패전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소련은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사병들은 모두 조기 석방했고, 장교들은 자국 내의 수용소로 데려갔다.[* 이 외에도 120만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을 소련 내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송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으나, [[카틴 학살]]과 달리 이는 서방 국가에 '''[[듣보잡|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여러 번의 심문을 통해 비협조적으로 판명된 장교들은 모두 1년 후 [[카틴 학살|처형해서 암매장했고]], 이 수는 2만 2천여 명에 달한다. 학살 희생자 중에는 단순히 장교뿐만 아니라 성직자, 작가, 정치인, 교수, 조종사, 변호사, 의사 등 폴란드 [[엘리트]]들도 포함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폴란드가 다시는 소련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아예 지배층을 모조리 섬멸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모두 처형당한 것은 아니며 소련 측에 협조적이었던 인사들은 살아남았다. 이들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이 조직한 친소 폴란드군(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와는 대립하는 세력)에 들어가 나치와 다시 싸웠고, 훗날 소련의 위성국이 된 폴란드군의 수뇌부가 된다. 소련군과 함께 싸운 폴란드인들은 [[자유 폴란드군|서방군과 싸운 폴란드인들]]보다 수가 훨씬 많아서[* 이는 소련이 폴란드 동부에서 서부로 진격하면서 징집령을 발표해 폴란드 젊은이들을 막무가내로 군에 처넣은 것도 있긴 하다.] 1945년 시점에 44만 명에 달했으며, 레니노 전투, 콜베르크 전투, [[베를린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서 열심히 싸웠다. 단 레니노 전투의 경우는 전투에 참가한 폴란드군이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과 보급품도 부족했기에 독일군에게 패배했으며, 전쟁 말기 바우첸 전투의 경우는 폴란드 공산군 측의 지휘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바우첸 전투는 영미군과 소련군에게 [[샌드위치]]로 쌈싸먹히고 있던 나치 독일이 전쟁 말기에 이르러 거둔 '''사실상의 유일한 승리'''이기도 하다. 뭐 그래도 이 승리는 유종의 미를 거둔 건 제외하고 독일에게 아무런 전략적 의미도 없었지만. 한편 인민군의 장교 수는 4만여 명에 이르렀지만, 소련이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장교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탓에 장교 숫자가 모자라서 절반을 소련 출신으로 때웠다고 한다. 침공 과정에서 나치당이 절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그단스크|단치히 자유시]]는 독일로의 합병을 선언했고, 이후 폴란드 서부 영토 일부와 단치히 회랑이 독일 본토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는 총독부가 설치되어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당연하지만 나중에 패배한 후 독일은 폴란드로부터 뜯어낸 영토를 모두 토해낸 건 물론이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동부 영토까지 거의 대부분 폴란드에게 빼앗겨([[쾨니히스베르크]]와 그 인근 지역은 러시아에게 뜯겼다) 훌륭한 인과응보의 예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를 참고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